로마서 8:17 - 25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영광으로 들어가려면 '고난'은 필수적이란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4-25)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살면서 겪는 위기나 고통을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고난'의 의미는 훨씬 더 폭이 넓고 깊습니다. 마가복음 8:34로 그 의미를 찾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막 8:34)
여기서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고난'의 원형입니다.
자기부인
먼저 '자기부인'은 '자기 의의 부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의'가 있습니다. 나의 가능성에 대한 의, 나의 성과들에 대한 의,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 등이 그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모든 의를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의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세워주고 존재가치를 빛내 줍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너는 무가치한 존재야", "네가 이룬 성과는 아무 가치가 없어" , "너에게 가능성이란 없어"...라고 나를 평가한다고 해봅시다. 얼마나 화가 나고, 얼마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말인가요. 그와 대판 싸움이라도 해야 성이 좀 풀리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려면 반드시 이렇게 '자기 부인'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과정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자기부인'이 구원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니요.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가요? 자격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선물이 은혜가 되려면 받는 대상의 '받을 자격 없음'이 먼저 드러나야 합니다. '자기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구원을 선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자기 의를 빼놓으십니다. 100%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이 받는 이들에게는 '고난'으로 감지됩니다.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는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부인'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이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모함을 당하신 후 죄인으로 판정받으셨습니다. 그 후에 벌거벗겨지시고, 침 뱉음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손과 발이 대못에 박히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까지 받으셨습니다. 결국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이 전 과정이 '자기부인'되신 예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기주장이 있습니까? 자기 의가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시편 22:6에서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자기부인'으로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과정을 그와 연합된 성도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 그렇지요? 그것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진리를 전하다가 사람들의 오해와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죄의 옷을 다 벗김 당한 후 부끄러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모든 자기 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말씀의) 기둥에 꼭 붙들려 살게 됩니다. 일생 자기만 붙들고, 자기만 사랑하며,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던 자가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십자가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예시
성경에는 이런 '성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40년 '광야생활'이 그 한 예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자기의'를 부인시킨 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20-21의 나사로의 삶도 성도가 받는 '고난'의 좋은 예입니다.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그는 한 동안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해 있었습니다. 온몸에는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한 부잣집 앞에 가서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라도 얻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자집 개가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결국 그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습니다.
비유지만 이 말씀 속에 성도의 고난이 정확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마음이 가난한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반대로 '부자'는 자기 의로 가득 찬 '율법주의자'들을 뜻합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는 '율법주의'의 말, 즉 거짓말입니다. 그 말은 나사로의 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개가 나사로의 상처를 핥았다'는 것은 율법주의가 성도를 핍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도는 마음이 가난한 거지로 살다가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고, 결국 완전히 자기부인된 채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정확히 '자기부인', '자기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삶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잘 전달되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고난' 후에 하늘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에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은 선한 것입니다. 어차피 받아야 할 '고난'이라면 용감하게 수용하는 것이 믿음의 태도일 것입니다. 고난의 대명사였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빌 3:10-11)
그는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따라 자기도 죽고 부활에 이르겠다고 말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모범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 태어나, 고난을 필연적으로 겪습니다. 하지만 이 생활은 잠시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이 옵니다. 피조물들도 이 사실을 알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19-22)
우리 성도들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가요? 몸의 속량입니다.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소망은 반드시 이루질 것입니다. 잠시만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