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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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편지/로마서 이야기

(로마서 이야기 48)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홀씨지기 2024. 7. 1. 20:51

로마서 9:19-29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평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동일선에서 출발해서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을 받는 사회적 시스템을 말할 것입니다. 사회의 질서를 잘 유지하려면 이 원칙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망하고 자본주의가 번성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원리로 살던 인간들에게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할까요?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할 것입니다. 공평의 정신에 맞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면 절대로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평한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라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이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보겠습니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19-21)

성경은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음 받은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에게 대들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지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흙덩이는 보석을 담는 용도로 만들 수도 있고, 어떤 흙덩이는 쓰레기를 담는 그릇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때 쓰레기통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왜 나를 이렇게 하찮게 만들었냐고 장인에게 따질 수 있을까요? 안됩니다. 그릇은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인간은 그가 만드신 그릇입니다.  인간은 각양각색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본질이 흙덩이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22-23)

만드신 그릇들 중에는 심판의 권세를 나타내시기 위해 만들어진 '진노의 그릇'이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낼 용도로 만들어진 '긍휼의 그릇'도 있습니다. 누가 더 잘하거나 잘못해서 이 둘이 용도가 나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님 마음에 있던 대로 그들의 용도가 정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직 인간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다면 그 마음이 점점 사그라들게 될 것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롬 9:24-26)

여기서  '이 그릇은 우리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당연히 '긍휼의 그릇'으로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없이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사실을 두고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백성 될 기회를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던 자들에게 아들 될 자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자격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자격을 주는 것이 '공평'한 처사입니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를 적용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처음 자리는 '흙덩이'였습니다. 죽은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존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거저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핵심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록 '나'는 죽습니다. 그렇게 '나'가 죽을 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커져만 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의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으로  맞춰야 할 퍼즐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27-29)

위 본문에서 '남은 자'라는 구절을 잘 보세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오직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남은 자'들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는 누구를 말할까요? 위에서 언급해 온  '긍휼의 그릇'들입니다. 이들이 거룩한 성도요 참 교회라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받지 않고 있는 것은  '남은 자들'이 다 열매로 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부어주심으로은혜를 아는 자들로 키워가고 계십니다. 그 뜻이 다 이루어지면 예정된 심판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열려있던 하늘의 문이 닫히고 구원의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