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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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편지/성경읽기 원리

(성경읽기 원리 17)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홀씨지기 2024. 4. 12. 13:04

마가복음 11:20-21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쭈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하루 만에 나무가 말라서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읽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지식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12-14)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먹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보니 나무의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사실 아직 열매가 익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나무로부터 영원히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무슨 말씀이신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자 놀랍게도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서 죽어 있었습니다. 나무가 단 하루 만에 고사할 수는 없으니, 어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결과로 일어난 일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행하신 것일까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겉만 번지르한 유대주의, 즉 외식하는 신앙인을 의미합니다. 즉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적 신앙인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그들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 분노가 얼마나 큰지 막 11:15-17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어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물장사를 하던 장사치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이 사건이 오버랩 되는 장면입니다. 이 분노는 내용 없이 겉만 깨끗한 율법주의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늘 율법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몸으로 지킴으로써 의를 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쌓인 의의 댓가로 영생도 얻고, 삶의 축복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하고 서로 지키려 했습니다. 모세오경에서 명령하는 계명들을 수 천 개의 규례로 나누어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십일조를 감당하려 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으며, 가난한 자를 섬기는 구제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겉만 본다면 그들만큼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런 그들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속은 오물로 가득 차 있는 보석상자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역할을 오해했습니다. 율법을 신으로 섬긴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우리의 안내자일 뿐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율법을 의지해서 살면 어떻게 될나요? 율법이 신이 됩니다. 율법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의 교훈으로 바꿔서 열심히 행하는 것으로 '자기 의'를 삼으려고 합니다. 이런 행위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을 묵상할 때 이 흐름을 놓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입니다.

 

 

우상숭배

 

구약을 읽다 보면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방신을 섬겼다고 그렇게 많은 책망을 하시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도 유대인들이 이방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 천년동안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도 불사했습니다. 성경 문헌을 유지하려고 매일 목욕재계하면 필사에 매달렸던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봐도 그들이 우상숭배를 심하게 했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선지자들은 유대인들을 향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계속 외쳐댔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0-11)

 

 

위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외식을 행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던진 말입니다. 무수한 제물, 그것도 살진 짐승으로 바쳤다면 잘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신처럼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듯 우상숭배의 실체는 하나님을 율법적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율법주의'와 전쟁을 합니다. 소위 말하는 '영적전쟁'의 실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죄는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가인이 그랬고, 노아시대 네피림들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홍수심판 이후 니므롯, 애굽의 바로, 사사시대 가나안 원주민들, 왕정시대 이스라엘 주변국들이 전부 이 길을 갔습니다. 유대인들도 같은 길에 빠졌습니다. 

 

그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거치며 한 차례 분기점을 맞기는 했지만,  그 흐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 내에 '율법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죄는 기승을 더 부리면 부렸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속지 마세요. '율법주의'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 중의 죄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가르쳐 주는 '몽학선생'일 뿐, 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주의'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도 그것을 저주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오셔서 '율법주의'를 완전히 부수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던 자들을 전부 영원한 어둠 속에 던져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깨어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