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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편지/성경읽기 원리

(성경읽기 원리 11)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홀씨지기 2024. 3. 8. 22:31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위에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할까요? 

 

'행함'을 생각하면서, 주일예배를 참석하는 행위, 기도하는 행위, 헌금드리는 행위, 전도하는 행위, 구제하는 행위, 성경을 읽고 배우는 행위, 선교하는 행위...  등 이런 목록들이 먼저 떠올랐다면 아직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다

 

믿음의 행위로써의 본보기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의 좋은 예로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기생 라합이 유대인 정찰병들을 살려 준 사건입니다. 각각의 본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22)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5-26)

 

 

1.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사건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을 어렵게 얻었습니다. 그에게 이삭은  금지옥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청천병력 같지 않았을까요? 누가 봐도 합당하지 않아 보였고, 따르기도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군말없이 명령에 순복합니다. 명령을 들은 바로 다음 날 채비를 갖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제단을 쌓고 이삭을 칼로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보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믿음을 배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해석이 맞다면 그와 가장 유사한 믿음의 행위를 드렸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매달 십일조를 드렸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으며, 사회적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율법을 사수하기 위해 자기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까지 하시며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의아하지 않은가요? 

 

 

2.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준 사건

라합의 사건도 얼핏보면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숨어 들어왔던 정탐꾼들을 숨겨서 살려주었습니다. 민족을 배신하는 반역자 노릇을 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민족 전체의 운명을 파멸로 몰아넣은 이런 그녀의 행위가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맞을가요? 그런데 성경은 그녀의 행위를 두고,  '믿음의 행위'라고 평가합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3. 두 사건의 진의

두 사건의 진의는 이렇습니다. 

 

'이삭'은 언약의 씨로 얻은 자녀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진짜 씨는 아닙니다. 이삭은 언약의 씨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이고, 참된 씨는  '그리스도로 오실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아브라함이 계속 이삭을  '언약의 씨'로 간직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이 개념을 연장해서 예수께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몸'은 육체입니다. 그 육체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육체이신 예수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와 연합하지 못한 채로 계속 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면 내 마음에 있는 육체이신 '예수'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 명령의 진의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죽입니다.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에 몸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던 그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나라 백성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을 도왔습니다.

 

'라합의 믿음'이란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며 확신입니다.  나라와 족속, 피부와 성별을 떠나 '하나님의 영'을 간직한 자들은 모두 이런 '라합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며 서로 협력합니다. 세상의 백성들과는 다른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행위

 

야고보 사도가 말했던 '믿음의 행위'는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 열심과 그에서 파생되는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유대교인이나, 이슬람인들, 불교인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을 가진 이들만 할 수 있는 독특한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가지고 조금 더 부연해 보겠습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행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일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믿음'과 '일(행위)'를 같은 의미로 동치시키신 것입니다. '믿음'과 '일'이 같은 뜻이 될 수 있나요? 될 수 있습니다. 바른 믿음이 바른 행위를 내놓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내려주십니다. 성령은 받은 이들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간직합니다. 그 믿음을 가진 이들은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합니다. 말씀으로 이웃을 사랑하기도 하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기도 하며, 죽은 자들을 살려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 믿음을 가진 이들만 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