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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편지/로마서 이야기

(로마서 이야기 23) 참과 거짓 & 실재와 모형

홀씨지기 2024. 4. 4. 06:00

로마서 3:3-8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오.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선물로 받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믿지 않은 자'들에 대한 책임을 그 자신들에게 지우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든 적이 있지 않은가요? 스스로 믿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고 일어나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믿게 된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이고, 믿지 않게 된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게 된 사람의 죄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에게 묻는 것이 과연 의로운 처사일까요?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믿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스스로 부정했으니 그 책임을 물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에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 존재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께서 내리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할 자를 선택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실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두셨으니 그런 하나님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어찌 세상을 심판하리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다'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선한 것이고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죄를 허락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모형과 실재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오"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나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 풍성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어떻게 '거짓'이 참을 더 풍성하게 한단 말인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 속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모형론'으로 이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모형(medel)'과 '실재(real)'가 있습니다. '실재'는 참 그 자체이고, 모형은 '실재'를 흉내 낸 모조품입니다. 그러므로 모형은 '참'에 반하는 '거짓'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서로 보완적입니다. 참이 없으면 거짓이 설명되지 않고, 거짓이 없으면 참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거짓이 없으면 '참'이란 단어도 필요가 없습니다. 실재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으로 빛을 설명할 수 있나요? 불가능합니다. 빛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에 대비된 '어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마치 그와 같습니다.   인간은  실재이신 하나님을 모형 하는 존재, 즉 '거짓'으로 이 땅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반면 인간은 악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반면 인간은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반면 인간은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왜 그래야했을까요?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악하면 악할수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거짓되면 거짓될수록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나타납니다. 또한 인간이 한계적일수록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성이 드러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밝게 보이는 것과 같이 인간의 죄가 깊을수록 하나님은 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는 방식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나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경험할 때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나요?  나같은 죄인에게 조건없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입니다.  나의 죄가 깊으면 깊을 수록, 그런 나를  찾아오셔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길이 있었을까요? 없습니다. 터널을 지난 다음에서야 빛의 소중함을 아는 것처럼, 세상의 죄를 알았기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죄'가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납니다. 이를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화평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이제  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여기서  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마음대로 져도 좋다는 취지로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죄는 반드시 단죄되어야 하고,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죄는 그 자체로는 사라져야 할 절대 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내면에 숨어있는 단 한 점의 죄까지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의 옷을 입혀 세상에 보내신 후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십니다. 그 후 죄를 철저히 심판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걷고 있는 구원의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