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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편지/로마서 이야기

(로마서 이야기 38) '율법'과 '율법주의'의 차이

홀씨지기 2024. 5. 24. 20:50

로마서 7:7-13
0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0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0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말하다 보면 '은혜'를 설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필연적으로 '율법'을 꺼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와 '율법'의 관계는 '빛'과 '어둠'처럼 서로 대척점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 보니 '율법'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오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율법'은 선한 것이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친절한 동반자입니다. 왜 그런지 본문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07)

'율법'은 죄가 죄인지를 가르쳐 주는 도구입니다. 사회에 법이 없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죄를 판단하고 정죄할 기준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회는 곧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정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힘이 통치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법이 없었으면 우리는  '탐심'이 죄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이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간음이 죄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죄가 있는데, 죄를 모르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법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을 '이상세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 속에 그런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능

율법이 강력하게 적용되는 세상일수록 숨겨진 죄가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가 죄가 되겠어?" 하는 일들이 죄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의롭다고 여기던 일조차 죄로 드러나기도 할 것입니다. '율법'은 그런 기능을 합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며 모두가 선망하던 일조차 죄로 책망을 합니다. 그 예시로 로마서 중 한  구절을 들어보겠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의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0-15) 

말씀은 인간들의 죄악 된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라고 하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선해 보여도,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어 보일 만큼 착하게 보여도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려있는 무덤이라고 합니다. 말만 하면 거짓말만 하고, 독사의 독이 가득해서 그 독으로 사람들을 죽인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저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반발심이 들지 않을까요? 세상에 악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바울이 대표적으로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는 동년배들보다 훨씬 더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만난 후 그의 모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율법에 다시 비춰보니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만 보였습니다. 내면이 쓰레기로 가득 찬 오물덩어리인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롬 7:9-11)

그는 율법을 붙들고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자기가 죄인이고 죽은 자인 것을 발견할 뿐이었습니다. 율법이 그를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은 본래부터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발견이 있을 후 은혜가 그를 덮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이 그를 죽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에게 참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구원의 첫 단추 

구원의 첫 단추가 무엇인가요?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100% 인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100% 순도의 고백만을 받으십니다. 인간은 일부분이라도 자기의를 갖으면,  그 의를 내세우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을 요구합니다.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마음속에는 자기 의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의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책망 앞에서 100% 자신의 죄를 인정한 자들만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들만 구원의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책망은 더 강하고 날카로워야 합니다. 사람의 폐부를 찔러 쪼개어 아무 할 말이 없을 때까지 그리 해야 합니다. 율법의 순기능을 알게 된 바울은 다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명확하지 않나요? 율법은 우리를 천국의 문 앞에까지 인도하는 동반자입니다. 율법이 아니었으면 내가 죄인인 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죄인인 줄 몰랐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사랑해야 합니다. 율법의 책망을 달게 듣는 겸손한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율법주의


'율법'이 선한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존재로 자라날 수 있다'는 인간의 헛된 믿음입니다. 이를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율법주의'가 모든 불행의 씨앗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도구로 그 역할을 그쳐야 합니다. 더 나가면 율법이 우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율법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의지와 노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늘 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를 '인본주의'와 같은 범주로 넣을 수가 있습니다. 이 둘은 이름만 다를 뿐 본질은 같습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고 주인 노릇을 하도록 부축이는 교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이 선한 것임에도 오해를 사는 이유는, 이  '율법'과  '율법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분명하게 그 차이를 마음에 새겨 두기 바랍니다. 

'율법'은 나의 죄를 알려주는 선한 동반자입니다. 반면에 '율법주의'는 율법을 의의 수단으로 삼아 끝까지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거짓된 믿음입니다. 

이 차이를 확실히 이해하고 '율법'을 선하게 활용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책망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율법이 강하게 책망하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신을 인정하고 주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그 후로는 은혜의 법칙이 작동합니다. 아침 햇살에 어둠이 물러가듯 인생에 밝은 빛이 비춰지게 됩니다. 

 

결론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세상에 죄가 있었고 그 죄를 율법이 책망하여 드러냅니다. 책망 후에는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을 인생의 최종 목적이라고 할 때,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도 은혜고, 율법도 은혜고, 사망도 은혜고, 내 삶의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