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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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편지/로마서 이야기

(로마서 이야기 41) 육신의 생각 VS 영의 생각

홀씨지기 2024. 5. 29. 18:44

로마서 8:5 - 11
0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0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0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0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0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 반면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몸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이 서로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영생을 열매로 얻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영'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따르는 것과, '영'을 따르는 것은 각각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시 읽기를 멈추고 스스로 답을 해 보기를 권합니다.

여기서 엉뚱한 답을 내놓으면 지금까지 한 일들이 모두 허사가 됩니다.  인생의 방향도 틀려지게 됩니다. 깊은 묵상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일

'육신'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은 '율법'을 뜻합니다.

율법을 따르는 사람은 '율법의 일'을 생각합니다. '율법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 곧  '율법주의'를 의미하고, 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당연합니다. '율법주의'는 '은혜의 법'과 완전히 반대로 가는 길이니까요.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를 따른 결과는 '사망'입니다. 이 말은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율법주의를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 영의 일

'영'은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은 '진리로 이해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이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니다. 

'성령'이 있는 이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상태이지만, 영은 살아 있습니다. 그 몸도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빠지기 쉬운 오류

'육신'과 '영'이 무슨 뜻인지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범하는 오류를 한 가지 말해 보겠습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율법주의'를 따르므로 '육신의 생각'대로 살게 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말라'는 말을 육체적 욕망이나 세상적 욕심대로 살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고는 '성적쾌락에 집착하지 말라', '물욕을 버려라', '각종 중독을 일으키는 생각들에 주의하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 교훈에 적용합니다. 

반면에 '영의 생각'은 성령이 주시는 생각이라고 정의하고는 곧바로 '경건한 생각', '누군가를 돕는 마음', 교회에서 부여된 사명' 등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행위를 떠올립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고서 말입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 하지만 여기에 중대한 오류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라보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이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선악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 모든 일을 감당해내야 합니다. 일의 원인과 결과를 인간 스스로 이끌어내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성령이 충만하면 육신의 욕망대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이 도와주시면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일까요? 나의 행위에 따라 성령이 오셨다, 떠났다 한다면 우리는 늘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이야 말로 그렇게 주의하라고 말했던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인간은 죄의 덩어리입니다. 세상 또한 전체가 어둠에 덮여 있는 '죄' 자체 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죄입니다. 그 어떤 선한 일도 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숨 쉬는 일조차 자기를 위해 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죄 아래 놓인 인간과 세상의 실체입니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런 인간을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됩니다. 이 은혜를 배우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은 무너졌습니다. 그 후 '은혜의 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법은(하나님의 법)은 나의 행위와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는 법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며, 그 법의 근원은 은혜의 법입니다. 성령에 의해 눈이 떠진 사람은 이 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을 뜨지 못하면 여전히 죽어있는 '율법'을 붙들고 살 것입니다.